[강인선 LIVE] 어느새 우리는 단풍놀이까지 지시받고 있다
코로나가 국민의 개인적 삶을
억압할 권한 주는 건 아니다
광풍이 지나면 수십년 쌓아올린
민주주의 탑에 구멍이 나 있을 것
정부가 요즘 ‘불가피하다’는 말을 자주 쓴다. 코로나 방역을
내걸고 국민의 기본권과 사생활을 건드리고 있다는 건
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경찰 1만명과 버스 수백대, 철제 울타리
1만개로 광화문 주변을 완전히 막고 나서, “전염병 감염
확산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진영 행안부 장관도 차벽 설치 등의 조치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사생활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제한되어야 한다.
사생활은 중요한 인권이지만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다”라고
했다. 강 장관은 한 연설에선 “고집스러운 비협력에 대해선
집행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면서 정부의 코로나 통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정부는 국민 생활을 세세하게 살피고
챙겨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가 정부에게
국민들의 개인적인 삶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억압할 권한을
주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방역 성과에 과도하게 몰입한 정부는 묘하게
엇나가고 있다.
감염병 예방과 감염 전파 차단을 위해 필요하다면서 인적
사항, 위치 정보, 신용카드 이용 정보 등 개인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는 것은 물론 활용·공유하고,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국민을 겁박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개천절 집회를 겨냥,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관용도 없을
것”이라고 했고, 경찰은 차량 시위를 막기 위해 운전면허를
취소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았다.
국민을 어린애 다루듯 온갖 지침을 내놓기도 한다.
최근엔 환경부가 ‘코로나 단풍 지침’까지 내놨다. 단풍철
단체 탐방을 자제하고 집에서 모니터로 단풍을 감상하라고
권하면서, 국립공원 탐방 밀집 지역엔 금지선을 설치한다고
했다.
비상 상황이지만 존엄을 지키고 위험 부담은 스스로
판단하면서 살고 싶은 국민 마음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다.
위기가 닥쳤을 때처럼 정부가 일하기 쉬울 때도 없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런 경우였다. 그는 플로리다주 재개표
논란 끝에 가까스로 대통령이 돼 지지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9·11 테러 위기를 딛고 지지율 90%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진 대통령으로 다시 태어났다.
부시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심장부가 테러로 초토화된
상태에서 국민들이 좌우 따지지 않고 결집해 힘을 모아준
결과였다.
진짜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미국은
그 논란 많았던 애국법을 통과시켰다.
테러 위협이 의심될 때 도청도 가능케 하는, 평시엔 결코
용납되지 않았을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일부 유보시키는
법을 만들었다.
위기는 민주주의를 해치는 조치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그때 배웠다.
지지율 90퍼센트 대통령 앞에 반대 목소리는 쪼그라들었고,
9·11 테러의 충격이 너무 커서 국민들도 그런 조치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훗날 실패한 전쟁으로 막을 내린 이라크 공격 역시 테러로
인한 위기감과 부시의 자신감 위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코로나 위기는 나라마다 가장 약한 고리를 더 약하게
만든다. 지금 미국의 약한 고리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코로나 감염 후 입원 치료 사흘 만에 뛰어나와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정확한 정보와 과학적 판단이 서야 할
자리를 흔들고 있다.
우리의 약한 고리는 다양한 의견 수렴을 통한 합의 도출
기능을 상실한 거대 여당과 정부이다. 코로나를 이유로
합법과 불가피를 남발하며 기본권을 침해하면서도 자제하지
못한다.
이대로 두면 코로나 광풍이 지나가고 난 후엔 수십년을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탑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을 것 같다.
[출처:조선일보 / 강인선 부국장]